이순종 - 섬세하고도 섬뜩한, 그리고 아름다운  / KR

[아트인컬쳐_2002년 7월호_Emerging Artist]

 

이순종은 하나의 매체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을 해온 작가. 퍼포먼스에서 평면, 입체, 영상까지 그가 사용해온 언어는 다양하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오랜 유학생활 때문인지 한국인이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초기부터 이어온 중요한 화두다. 머리카락으로 사군자를 조형하는 그 대표적인 작업 방식은 바로 ‘전통’이라는 뿌리를 딛고 표현하는 여성성 .박영택은 이 기묘한 이미지에서 섹슈얼리티, 여성적 공간, 종교성 그리고 사회에 대한 발언까지 읽어낸다. ‘미인도’에서 ‘메두사’까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섬짓한 아름다움. 그 속에 내재한 ‘여성’으로서의 삶과 그 본질로 다가가보자.

 

Lee Soon Jong – 섬세하고도 섬뜩한, 그리고 아름다운

글. 박영택(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이순종이란 이름은 다소 특이하다. ‘순종(한자)’은 순수한 혈통(pure blood)이란 뜻을 머금고 있다. 이름은 무의식 중에 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오래 전부터 ‘순수함’에 막연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도 아이러니컬하게 작가의 작품은 정작 ‘잡종적(hybrid’이다. 작업의 태도가 그렇다는 말이다. 아마도 ‘순종’이란 이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자신으로 하여금 작품에 있어서 한 가지 형식이나 매체를 거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순수한 혈통을 지키는 것보다 작품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언어를 찾는 것이 주된 관심이고 그것이 자신의 혈통을 순수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무수한 ‘잡종’으로 나가다 보면 경계가 지워져 결국 ‘순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미술은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귀국 후 마련한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일련의 전시들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고 낯선 감각으로 매체를 다루는 독특한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부드럽고 연약한 재료들을 다룬 설치작업, 그리고 일상적 삶의 공간에서 취한 키치적인 사물들(대부분 황학동에서 구해 온 오브제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관찰되는 기괴함과 조약함, 집단주의 이데올로기와 과도한 신앙심, 맹신적인 정신주의를 해학적으로 건드린 작업, 유연하고 익살맞은,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풍자정신 같은 것들이 반짝이던 작업들로 기억난다. 그 작업들은 결국 자신의 삶의 환경에서 끊임없는 호기심과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반응한 것들, 자신의 몸으로 겪은 세상에 대한 반응을 일상적인 사물들로 자연스럽게 표현해낸 것들이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 지속적으로 자신의 감각의 더듬이로 해석한 삶의 자취들이다.

따라서 그 작업들은 기존의 관습적 조각의 관례와 전문가의 권위적 음성, 미술/조각이란 모종의 특권화된, 관념의 경화로 뭉쳐진 세계들과 거리가 먼 것들, 그런 것에서 풍기는 내음이 탈취된 것이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언어로, 습관화된 언어가 아닌 자신만의 감각의 소리로 만들어진 것들은 기존 조각에 비해 얼핏 아마추어적이고 소박하고 값싸고 난삽해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미술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작가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과 작업을 어떤 식으로 연결지어야 하는지를 물어보며 그 답을 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 임을 보여주었다.

 

남성과 여성, 그 ‘사이’의 길 찾기

 

이순종의 작품들은 흔히 ‘남성적/여성적’이라 분류하고 규정짓는 문화 형태를 상호 교차된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그 경계를 허물고 ‘중간자적 입장’에서 조형화해 왔다. 14년간의 미국생활 이후 다시 7년여동안 미군 내 대학 강사 생활을 해 온 그녀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 남성문화와 여성문화의 틈새에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어왔다. 그러니까 미국에서의 오랜 생활 이후 귀국한 그녀는 여전히 미국문화와 한국문화의 어떤 ‘틈과 사이’에서 생활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그래서 부유하는 노마드적인 애매모호함이 작업의 특징이 되었다. 여기서 여성이라는 성적 정체성은 그 애매모호함을 더욱 가중시킨다.

어떤 사이와 틈에서 세계와 현실을 보는 이는 일방적인 지시체계와 통제에서 벗어나 모든 것들을 의심스럽게, 희한하고 엉뚱하고 우스꽝스럽게 본다. 그녀는 그렇게나 세계를 낯설게 느끼고 의아하게 만난다. 특히나 미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귀국한 이후 이 땅에서의 문화와 사물들은 기이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진짜가 아닌 가짜로 이루어진 허구의 현실은 그래서 위장된 세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급속한 현대화, 산업화, 근대화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현실 역시 상당히 기묘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어느 면에서는 실종된 문화의 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군 내 대학에서 미술을 강의해 오면서 기묘한 완충지대와 같은 흡사 DMZ와도 같은 병영이라는 공간 체험 역시 중요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기묘한 삶과 문화의 공간이고 나아가 병영이라는 남성들만의 공간이기에, 이곳에서 여자로 겪는 체험이 그녀의 시각과 감성을 애매한 지점에 머물게 하면서 사물을 관찰하게 한 것 같다.

90년대 초 군대 문화를 차용한 작업들은 ‘규율, 통제, 강인함’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군대 문화를 가장 남성적인 요소로 파악하고 이를 독특한 방식으로 비틀었다. 즉, 강한 것은 약하게, 딱딱한 것은 부드럽게, 직선은 곡선으로 바꾸는 것이다. 조각조각 패치워크한 아령, 식탁보로 탈바꿈한 군복, 꽃병화 된 폭탄 등은 남성적 상징물을 여성적 시각으로 탈바꿈시킨 예다. 여성 문화의 매개체로 선택한 것은 ‘청결, 정돈, 일상’등을 상징하는 그릇이다.

 <구급용 찬장>에서 보이는 세라믹으로 떠낸 이국적 기물들은 군사박물관에 보관된 유물들과 병기고에 놓여 있는 여러 무기들을 응용해 만든 것으로, 기물의 주형은 원래 작가가 가르쳤던 미군병사들이 교양 미술 실습용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다양한 모양의 그릇들은 흑연이 검게 칠해진 채로 하얀 찬장 속에 진열되어 있어 일반 찬장 안에 있는 우아한 본 차이나와는 다른 것들이다. 검은 색과 흰색 찬장의 부조화, 구급약 상자로 대변되는 일상적 가정 내의 위험 요소, 그리고 남성들의 공간인 군대와 여성의 공간인 부엌이 충돌된 상황이 찬장이라는 단일 공간에 혼성되어 있다. 그러나 여느 본 차이나와는 달리 찬장에서 검게 반짝이는 이 ‘무용지물’들은 마치 병기고의 성능 좋은 무기들처럼 징그러운 동시에 섹슈얼한 외관을 자랑한다. 아울러 위선적인 아름다움과 낯선, 독한 향수처럼 피어 오르는 사이비 미의식의 소유자인 속물 부르주아들의 교양, 문화를 은근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의 신체가 그렇듯 이 찬장은 기회만 있으면 빠져나오려는 이종의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물질적인 경계로서 그 명확한 기능과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아울러 그릇이라는 가장 안전한 물건이 때에 따라서는 말 그대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역설 또한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혼재되고 위장된, 그리고 진짜와 가짜가 뒤범벅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서 상반되는 요소를 동시에 부각시킴으로써 고정관념을 흐트려 놓으며 순간적인 혼돈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그가 문화적 중간지대에서 양자를 거리에 두고 관조하며 체득한 것으로, 관람객들은 이에 동참하면서 기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동양적 전통에서 시작한 여성성

 

작가는 이 작업을 끝으로 잠시 방황하게 된다. 입체, 평면,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일찍 선보인 그녀는 다시 3년에 걸친 미국생활을 통해 사신의 작업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간의 작업이 자생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유행 양식이나 주제에 치우쳐 있었다는 자각을 통해 그 같은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서예, 전각, 민화 등을 배웠고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이다. 이미지의 뿌리가 내 것이 아니면 지속할 힘이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결국 조선시대 여인의 길고 까만 ‘머리카락’으로부터 한국인인 동시에 여성이며 현대인인 자기 자신의 감수성과 무의식에 잠재된 이미지를 발견한다. 그것들은 물론 이전 작업과 여전히 연결선을 갖고 있다. 즉 여성의 해체적 감수성, 세계에 대한 다중적 인식, 감추어지고 억압된 성에 대한 은유 등을 읽을 수 있다. 여전히 여성적 경험과 관련된 ‘신체-머리카락’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녀가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사물에 대한 여성적이고 주관적인 인식의 표현작업’을 동양적 전통의 화두로 시작하고 있다. 섬세하지만 섬뜩한 머리카락은 인간 내면의 보편성을 세밀하게 드러낸다. 인조 머리카락을 이용한 설치작업과 한지에 먹을 사용하여 세필로 그린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일획으로부터>라는 제목의 연작은, 동서양 문화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보편적 지점을 동양인의 이해와 감성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5년간의 공백기 동안 작가를 매료시킨 것은 놀랍게도 동양의 화론과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였다. 전시 때마다 종잡을 수 없는 변신으로 관자를 놀랍게 했던 그녀는 석도의 ‘일획론’에서 시작된 모필 작업으로 또 한 번 변신을 시도했다. 그간 작가를 괴롭혀온 중추적인 문제는 지배적인 남성의 시각으로 작업해 온 자신의 모습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이었는데, 이순종은 육중한 덩어리 감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남성적 시선의 조각 작업이 아닌 가느다란 한 줄기 선으로 전체 공간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새로운 공간 조각의 힘을 발견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에는 묘하게 미소 짖는 <미인도>가 있다. 트레머리의 미인도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아르누보’의 메두사를 닮은 <미인도>는 한 줄기 머리카락으로 비었으나 비어있지 않은 공간의 실체를 파악한 이순종의 자족적인 미소이기도 하다. 동양화 재료인 모필을 통해 그녀는 혜원이 그린 미인도의 일부인 얼굴 하나를 커다랗게 반복해 ‘카피’하고 있다. 서예와 동양화에서 선 긋기란 팔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가 움직이고 반응하고 몸의 감각을 그대로 밖으로 뽑아내는 것이다. 그야말로 몸이 그리는 것이다. 동양화의 기본 필법과 묵법을 무시하듯 꼼꼼히 그려낸 여인의 얼굴과 화선지 위에서 잘 조절되지 않은 수묵의 어설픔이 그대로 드러난 드로잉들은 그 소박한 기법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인해 동양화가의 작업들과 선명히 구별된다.

 

살이 되고 육체가 되는 공간

 

얼굴 그림에서 출발한 작업은 이후 머리카락을 공간에 드로잉 하는 쪽으로 풀고 있다. 하나의 머리카락, 일획으로 나온 그 선은 공간, 허공에 자리한다. 그리고 그 선이 얽혀서 공간에 그려진 그림이 된다. 풀과 물을 섞어 뿌리고 다리미로 다려 압착해 마치 김처럼 된 머리카락들이 벽에 붙어 미인도 형상-실은 왜소하지만 이상한 힘을 지닌 작고 쪼그라든 작가의 할머니를 그린 것이다. 외할머니에 대한 작가의 각별한 애정과 추억은 초기작부터 나온다-을 그리거나 모서리에 쌓아 놓아 흡사 산이나 여성의 음부를 연상케 한다. 전시장 구석의 네거티브 모서리에 붙여진 잘게 부슨 머리카락 조각들은 흰색의 바탕과 이질적인 교접을 이루면서 기묘한 이미지를 형상한다. 단순히 더럽혀진 벽으로 혹은 점들의 추상적 드로잉으로, 혹은 신체의 일부 같은 구체적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다. 어찌 보면 징그러울 수도 있는 머리카락 조각들은 세 개의 선이 만나는 움푹한 공간에 수북히 뿌려 놓았다는 점에서 섹슈얼하다. 짐짓 이러한 이미지를 불식시키려는 듯 그 앞에 <산>이란 제목을 갖다 붙이는 트릭을 구사한다. 여기서 전시공간의 내벽은 살이 되고 육체가 되었다. 특히 바로크풍 액자 앞에 팽팽하게 당겨진 한 올의 검은 머리카락은 서구적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정작 내용은 텅 비어 있는 우리네 무국적 문화 앞에 들이미는 일련의 정체성에 관련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 한 올의 머리카락이야 말로 앞으로 이 작가가 풀어가야 할 작업의 방향을 포괄하는 ‘일획’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네 기둥>이란 작업은 인조 머리카락을 길게 연결, 천장과 바닥에 부착하여 네 기둥을 만들었다. 텅 빈 공간에 선으로 이루어진 기둥은 결국 환영이다. 이 네 기둥들이 만들어내는 ‘허의 공간’이 <네 기둥>들의 장력에 의해 ‘실의 공간’으로 지각된다. 속이 빈 기둥은 보는 이의 시선을 느닷없이 구멍에 빠지게도 한다. 안착되지 못하는 시선들은 방황하고 순간적인 공포에 빠진다. 눈으로 포착되지 못한 기둥은 그만큼 여성적 시선이며 그것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또 다른 신념의 표현이다. 아마도 이 점이 그녀가 지닌 일종의 ‘종교성’과 관련되어 보인다. 결국 종교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신에 찬 신념이다. 그리고 이는 여성에 더욱 가까운 신념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영과 육에 대한 동시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사이, 경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남성작가들이라면 확실한 덩어리를 세워놓았을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일획>이란 작업은 액자 틀을 벽에 기대 놓고, 그 위에 선을 사선으로 가로질러 놓았다. 프레임을 거부하고 밖으로 튀어나온 선은 그렇게 자족한다. 공간 전체가 캔버스가 되고 화면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머리카락이 모여 보자기나 둥지 같은 것이 된다. 유리병 안에 가득 들어간 머리카락과 표면에 부착된 인조 눈썹으로 이루어진 <꿈꾸는 사람>은 자신의 머릿 속, 마음속을 형상화한다. 다소 엉뚱하고 난삽하고 뒤죽박죽이면서 어쩔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이다. 여자로서의 한 개인의 내밀한 무의식의 세계가 섬세하고 절묘하게 공간에 부러졌다.

 

끊임없는 자기 탐구

 내 모든 것이 모인 몸, 그러니까 몸은 ‘모으다’에서 파생된 말이다. 몸은 그런 면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일이란 시간의 층위에서 서식한다. 그 모든 시간을 동시에, 현기증 나게 한다. 사람의 피부는 세상의 경계이고 상처 투성이며 ‘나’라는 정체성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자국전>에서 선보인 이순종의 작업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심리적 갈등과 의식의 흐름들을 유머러스하고 유희적으로 보여준다. 공 같은 실타래 뭉치에 자신의 얼굴 영상을 투영했다. 하나의 작은 점에서 출발해 서서히 커지면서 이리저리 튕기고 튀어오르는 상황을 연출하고 그 안에 다양한 표정(어리둥절해하거나 눈치를 보거나 혹은 눈을 질끈 감거나 외면하기, 혓바닥 내밀기)을 보여준다. 실을 둘둘 말은 얼굴 크기의 실패 위에 알 수 없는 말을 계속하는 자신의 얼굴이 영상으로 비친다. 구석방에는 실뜨개 하는 두 사람의 손이 영상으로 보인다. 작가의 개인적인 기억이면서 동시에 누구에게나 있는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작가의 관심은 무엇을 통해서건 어떻게 하나의 근원적인 이미지에 도달하는 가이다. 그리고 근원적인 이미지에 대한 신념 때문에 작가의 작업은 무척 진통적이다. 그러나 반면 그 이미지는 고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전통적이기도 하다. 착잡하고 모순적인 감정의 교차, 모니터가 현실의 프레임으로 설정되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의식, 심리적(?) 난맥상을 무척 재치 있게 표현하고 있다. 매체의 활용과 주제의식을 흥미있게 접목시켜 보여준 좋은 예다.

최근 작은 민화를 차용한 그림이다. 민화 속에 살아 있는 원초적 삶의 욕망, 희구, 건강함 등에 매력을 느낀 것이다. 비논리적이지만 사람을 살게 해주는 생명력을 섭취해서 표현하고자 한 것들인데 ‘삶의 극정’이란 요소를 끌어들이고 싶어한다. 삶을 어둡고 무겁지 않게 보는 삶의 태도 말이다. 인간 몸의 내장 기관과 민화의 한 부분들을 접목시켜 그린 그림은 우아한 그로테스크와 섬찟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 동안 해왔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의 생각이 굳지 않도록 해주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다소 혼란스러운 작업 태도에 대해 수긍하고 인정하며 그 일관성을 새삼 확인한다. 모든 작업들은 그렇게 다 이유가 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탐구하고 자기 언어를 발견하는 자세다. 추상적 이슈에 의해 움직이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자기적인 것, 자신의 내면의 얘기를 할 때 작품은 설득력을 얻는다. 다시 삶에 대한 재조명을 하고 이 삶을 어떻게 해석하는 가가 중요해졌다.

 작가는 인간의 나약함, 비겁함, 그 모든 것을 토대로 하여 나와 남이 이루는 삶의 관계를 모색하려 한다. 사람들이 행동과 말을 만들어내는 밑바닥에 대한 이 집요한 관심과 흥미는 결국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을 표현하게 한다. 인간의 나약한 형편에 대한 긍정, 가늘고 힘없는 재료들을 통해 그런 것들이 구조적으로 지탱되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세상을 긍정하고자 하는 태도다. 미술이란 행위 역시 그렇게 세계, 인간,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고 세상을 긍정하는 일에 다름이 아님을, 그리고 작업하는 일은 자신의 삶이 지속되는 순간까지 그런 모색과 반성과 감각을 멈추지 않고 부단히 독려하는 일임을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낯설게 일러주고 있다.

 

작가의 말

 

- ‘나는 모든 제의식을 좋아한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무한으로의 통로를 볼 때 눈물이 나게 기쁘다. 카오스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

-‘ 머리카락 한 올은 일 획이 되고, 일 획은 네 획이 되고, 네 획은 하나의 기둥이 되고, 또한 일 획은 잘게 부서져 점이 되고, 점은 모여서 규정지을 수 없는 이미지가 되고…’

 

이순종은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6년 홍익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도미, 14년동안 생활하며 1988년 노스텍사스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인전 5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바벨2002>를 비롯, 2002 광주비엔날레 프로젝트3 <집행유예>, <디아나의 노래>(문예진흥원 미술회관2001), <여성미술제>(예술의 전당 미술관 1999)등 여러 차례의 기획전에 참가했다.